3강. 가우디의 도시_로마 그리고 중세 바르셀로나

레이알 광장에 있는 가우디가 디자인한 가로등 / Ted McGrath (https://www.flickr.com)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암푸리아스에서 중세 도시까지

암푸리아스 그리스 주거지 / LeZibou (https://commons.wikimedia.org)

지중해 문화권에서 본 카탈루냐 거주지의 역사는 그리스 식민지 암푸리아스까지 거슬러 오른다. 기원전 575년경, 포카이아에서 온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거주지는 그리스식 격자 도시구조를 따랐으며, 중심에는 아고라와 신전이 자리 잡았다. 암푸리아스는 지중해 연안의 중요한 교역 거점으로, 이곳을 통해 그리스의 도자기, 금속 공예품, 포도주, 올리브 오일이 이베리아 반도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교류는 지역의 문화와 경제 발전 기반이 되었다.

현재 바르셀로나 지역의 초기 정착민은 이베리아족의 한 부족인 라에타니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몬주익 언덕과 해안가를 중심으로 생활하며 농업과 목축업, 해양 자원을 활용했다. 그들도 암푸리아스와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포도주와 올리브 오일 생산과 같은 지중해 농업기술을 도입했다.

Barcino / Museu d’Història de Barcelona / Enrique Íñiguez Rodríguez (2010)

기원전 15년경, 로마인들은 바르셀로나 지역에 ‘콜로니아 파브리아 율리아 아우구스타 바르키노Colonia Faventia Julia Augusta Paterna Barcino‘를 설립했다. 바르키노는 지중해 연안의 전략적 위치를 활용한 무역 중심지로 계획되었다. 로마 시대의 바르키노는 약 1,5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였으나, 정교한 도시 계획과 방어 시설을 갖고 있었다. 성곽의 높이는 약 9미터, 두께는 4미터로, 78개의 방어 탑을 포함하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했다. 도시 구조는 로마식 격자 구조로 북남 축인 카르도Cardo와 동서 축인 데쿠마누스Decumanus가 놓였고, 중심 포룸Forum에는 신전, 행정 건물, 시장을 두어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지도, 1808년

로마 제국이 쇠퇴한 후, 바르셀로나는 고트족, 이슬람 세력,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중세 도시로 성장했다. 13세기와 14세기 도시는 더욱 번영하며 영역이 확대되었고 도시 전역을 포함하는 성곽이 놓였다. 새로 건설된 성곽은 바닷가 항구를 보호하며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오늘날 람블라스에 해당하는 큰 길은 중세 성곽의 내성과 외성 사이에 위치한 해자가 있던 곳이다. 성곽은 비교적 경사가 낮은 해안가 지역을 따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으며, 몬주익과 같은 높은 지형을 방어에 용이하게 놓였다. 바르셀로나의 남서쪽에 위치한 몬주익 산은 해양과 육지 모두에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점으로서 바르셀로나의 구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우디는 “우리의 뿌리는 그리스의 해양원정대”

가우디의 작품 중 공공기관이 주도한 프로젝트는 대학 졸업 시기 작업한 레이알 광장의 이 가로등뿐이다. 장식이 많은 이 프로젝트의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 비판이 일자 가우디는 시장에게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프로토타입이며, 반복 생산을 할 경우 개별 단가는 급격히 낮아질 수 있다고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을 보면 반복 생산될, 다시 말해 이 도시 어디에 놓여도 우리를 대표할 ‘상징’은 가로등 꼭대기에 놓인 ‘머큐리의 투구'(그리스 신화에선 ‘헤르메스’에 해당)이다. 우리는 이 설계설명서는 ‘우리는 그리스의 해상원정대’의 후예라고 시작한다. 가우디는 카탈루냐 지역이 지중해 연안의 지중해 문화권으로 스페인 내륙의 고원(카스티야) 지역보다는 지중해 건너 그리스나 이탈리아와 더 비슷한 부류라고 주장했다.
레이알 광장에 있는 가우디가 디자인한 가로등 / Ted McGrath (https://www.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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