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유이스 보넷 이 가리

표지: (카탈루냐 건축사 협회 / 유이스 보넷 이 가리 아카이브)

건축가 유이스 보넷 이 가리 Lluís Bonet i Garí, 1893-1993

유이스 보넷은 20세기 초 활동한 카탈루냐 건축가다. 가우디와 40년 이상 연배 차이가 나므로 그는 동료라기보다는 가우디와 협력한 젊은 건축가쯤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1 1918년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보넷은 가우디의 성가정 성당 작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비슷한 개념을 자신의 건축물에 구현해보기도 했다.

Casa Milà / Antonio Gil (flickr.com)

보넷은 가우디 건축에 관하여 “그는 얼핏 쉬워 보이는 해법에 그치지 않고, 여러 요소를 단 하나의 면으로 표현하는 조형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이끈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평했는데, 나는 그의 생각에 크게 공감했다. 가우디는 대장장이 집안의 아들로서 그의 건물은 돌을 쌓아 덩어리를 만드는 건물과는 상당히 다른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냄비를 만드는 대장장이의 일을 생각해보자. 철을 두드려 덩어리를 펴고, 또 두드려 움푹하고 볼록한 면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들에게 입체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우디 건축에 대한 보넷의 이 한마디는 내 머릿속에 강하게 새겨졌다.

Casa Garí / Alberto-g-rovi (commons.wikimedia.org)

건축에 대한 보넷의 관심은 어쩌면 그의 외할아버지가 소유했던 가리 주택Can Garí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베이나트 델 크로스 지역에 지어진 이 주택은 가우디의 라이벌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건축가 주셉 푸치 이 카다팔크Josep Puig i Cadafalch의 작품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가톨릭에 대한 반교권주의 움직임이 있었고, 과격한 무리들이 성가정 성당의 사제관 등을 불태우며 가우디가 남긴 성당 석고 모형들을 파괴했을 때, 유이스 보넷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많은 자료를 구했다고 알려졌다. 전쟁이 끝나고 성당의 공사가 재개되었을 때, 그는 두메넥 수그라녜스 이 그라스, 이시드라 푸치 이 보아다, 프란세스크 카르도네르 이 블랑, 프란세스크 킨타나 비달과 함께 공사를 이어갔다. 유이스 보넷은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성가정 성당의 수석 건축가 역할을 수행했다.

산 미켈 델 크로스 예배당과 1929년 만국박람회 당시 비탈리시 은행 전시관에서는 가우디의 영향이 느껴진다. 이 건물들에 관해서는 카탈루냐 건축사협회의 아카이브가 잘 정리되어 있어, 그 자료 링크를 게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링크: Capilla de Sant Miquel del Cros(1929-1934)
링크: Pavelló del Banc Vitalici d’Espanya(1929)
  1. 그의 아들 중 둘은 성가정 성당 작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형 조르디 보넷 이 아르멩골Jordi Bonet i Armengol, 1925-2022은 건축가로서 1985년부터 2012년까지 성가정 성당의 공사 총괄 책임자로 활동했고, 동생 유이스 보넷 이 아르멩골Lluís Bonet i Armengol, 1931-은 가톨릭 사제로서 1993년부터 2018년까지 성가정 성당을 포함한 6개 성당 교구의 주임 신부로 봉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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