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예술 4월호] 밀라 주택_이성과 감성으로 빚은 건축

표지_ [도판1. 파세츠 다 그라시아에서 바라본 밀라 주택. 사진:MARIA ROSA FERRE (Wikimedia Commons)]
가우디의 마지막 주택

밀라 주택은 페라 밀라와 로세르 세지몽 부부의 주택으로 19세기 말 확장된 바르셀로나의 심장 파세츠 다 그라시아 거리에 지어졌다. 건설 기간은 1906년부터 1912년까지로 ‘부자들의 집을 짓는 건축가’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유독 주택 작업이 많았던 가우디의 마지막 주택이다. 이후 그는 성가정 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성당은 아직도 건설 중이니 밀라 주택은 가우디 생애 완성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택은 60세에 이른 건축가 가우디의 원숙하고 노련한 건축술과 조형미가 돋보이는 건축물로서 이성과 감성이 새로운 균형을 이루던 독특한 시대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과학에 대한 확신, 역동에 대한 이끌림

19세기말 유럽의 예술 흐름은 하나로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산업혁명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게 된 신흥자본가들은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무언가를 갈망했고, 전통 귀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고전의 안정과 균형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했다. 그들을 맞이한 새 시대, 새 질서를 오히려 일종의 불안정감, 즉 변화와 역동 속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이루어낸 변화에 대한 호감, 더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들이 쫓는 아름다움의 실체였다. 이 시대의 특수성은 이러한 격동적인 감성 속에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혁명을 불러온 실증과학의 가치, 즉 계몽주의에서 이어진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이성의 기반이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데 있다.

도시의 확장 그리고 새로운 도시 구조

중세 성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채 산업도시로 급성장한 바르셀로나는 19세기 살인적인 인구 밀도를 기록했다. 위생과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대치며 사는 환경이 조성되자 황열병과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공중보건 문제가 기간 산업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당국에서도 거주환경 개선을 위한 구조적인 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도판2 일데폰스 세르다의 바르셀로나 개조확장계획안, 1859년. 도판:Ildefons Cerdà i Sunyer (Wikimedia Commons)]
[도판3 에이샴플라 블럭의 안쪽은 넓게 비어있다. 사진:Richard Sennett (flicker.com)]

1859년 바르셀로나와 주변 지역을 대상으로 한 개조확장계획에 관한 공모전이 열렸고 도시계획가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의 안이 선정되었다. 정사각형 블록(113.3m × 113.3m)을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배치하고 그 사방에 폭 20m의 도로를 두른 계획안은 도시의 하부구조가 균등하게 배치된 무한 확장 가능한 새로운 도시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새롭게 건설된 이 구역에는 카탈루냐어로 ‘확장’을 뜻하는 에이샴플라(Eixampl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에이샴플라 블록은 ‘옆집과 서로 벽을 공유하는 좁고 긴 집’(이후 세장형 합벽주택)으로 구성되었는데 채광 환기면에서는 ‘사방으로 정원을 두른 영국식 전원 도시’에 비할 수 없었지만, 비워진 공간없이 꽉 채워져서 밀도를 높일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였다. 그렇게 높인 거주 영역의 밀도 덕에 블록 중앙에는 커뮤니티에서 활용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을 비울 수 있었다.

이상적인 계획안이었다. 만약 세르다의 계획이 원안대로 유지되었다면 모든 거주민에게 적절한 정도의 채광과 환기, 사생활이 보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자기 땅 한 평을 더 갖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속마음이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야금야금 건물을 더 지어왔고 결과적으로 건물의 깊이(그러므로 블록의 두께)는 당초 14m에서 20m, 나아가 24m까지 점차 늘어갔다. 문제는 애초부터 세장형 합벽주택은 앞뒤 5m를 넘어선 공간에는 채광과 환기가 되지않아 거주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세장형 주택이 더 길어지고, 열려있던 공공 공간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거주 환경은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모퉁이에서 문제가 더 심각했다. 일반적인 집들은 좀 길어지긴 했어도 앞뒤로 열린 덕에 집안의 바람 길을 따라 교차환기라도 되었지만 모퉁이 집은 옆집이 땅을 비워주지 않는 이상 뒤쪽으로 창을 낼 수 없는 구조였다. 이로 인해 에이샴플라의 모퉁이 땅은  주택이 들어서기에 매우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계획가인 세르다도 처음부터 모퉁이 땅의 이같은 문제를 예상하여 모퉁이를 꺾지 않고 열어두거나, 부득이한 경우 넓게 비워둘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난개발된 모퉁이 집들은 에이샴플라 지구의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겨졌다.

역동하는 형태 속에 숨겨진 기술적 해법 

에이샴플라 지구에는 보통 1층 상점, 2층 주인 거주 공간, 그 위 4개 층의 임대주택으로 구성된 주상복합 건물이 지어지며 가우디 주택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우디는 에이샴플라 지구에 칼벳 주택(1900년), 바트요 주택(1905년), 밀라 주택(1912년)까지 세 채의 주택을 지었는데 그중 밀라 주택만 모퉁이에 있고 입면 길이도 바트요나 칼벳 주택의 5배에 달할만큼 컸다. 이는 일반적인 에이샴플라 주택 4채가 들어갈 만한 대지 면적이다. 이 넉넉한 규모가 모퉁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제공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모퉁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이곳은 밀라 부부에게 걸맞는 상류층 주거지로 적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해결 방식이 밀라 주택의 복잡한 평면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도판4 뒷쪽을 열기 위해 건물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보통이다. 도판: 이병기]
[도판5 대각선으로 배치된 모든 집이 앞뒤로 열려있다. 도판: 이병기, {승강기(적색), 복도(주황색), 서비스 시설(남색), 안뜰(하늘색)}]

다른 건축가들은 대부분 모퉁이 땅을 잘게 나누는 방식으로 채광과 환기가 안되는 영역을 최소화한다. 모퉁이를 작은 집 셋으로 나누고 조금이라도 외기에 접하기 위해 뒤쪽을 비운다.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입장에서 불가피한 방법이지만 적극적인 해결책은 못된다. 가우디는 밀라 주택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땅에 접근한다. 밀라 주택 부지의 전면 길이는 84.5m 후면은 25m. 차이는 60m다. 다시 말해 직교 좌표를 유지한 네모반듯한 집을 지으면 60m에 해당하는 영역은 앞으로만 창이 나고 뒤로는 창을 갖지 못한다. 얼핏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가우디의 판단 기준이 오히려 더 명쾌하다. 전면과 후면을 4등분 하고 그것들 사이를 연결하는 집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외기와 접하려고 비워두었던 뒷 공간을 뚝 떼어 건물 한가운데 두 개의 광정(빛의 우물)을 만든다. 가우디는 1,620㎡(약 490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그 안을 비집고 기울이고, 또 비워가며 앞뒤로 열린 네 개의 집을 꾸역꾸역 그 사이에 끼워넣었다. 얼핏 쉽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에이샴플라 주택은 대부분 벽이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내력벽 구조로 지어지기 때문이다. 내력벽 구조는 벽 자체가 힘을 받는 구조체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직교 체계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에 보를 다섯 개 거는데 각기 길이도 다르고 방향도 간격도 다르다면 구조 계산이 얼마나 난해하겠는가? 가우디가 제안한 방식은 기술적인 지원이 없이는 건설이 불가능하다.

이성과 감성의 새로운 균형

그 해답은 석고 천장 안쪽에 숨겨져있다. 가우디는 밀라 주택 전 층에 철골 보를 사용했다. 겉보기에는 완전한 돌 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구조는 철골 아파트인 셈이다. 구조로 부터 자유로워진 내벽들은 유연하게 재조정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밀라 주택은 모퉁이 땅에서도 앞뒤가 열린 쾌적한 주거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도판6 비워진 광정을 통해 채광과 환기를 할 수 있다. 사진:Jose Ramirez (Wikimedia Commons)]

철골은 당시로서 상당히 값비싼 최신 부재였다. 가우디의 작품 중에도 구조 전체를 철골로 해결한 건물은 밀라 주택 뿐이다. 하지만 대단한 강도를 자랑하는 이 차가운 직선 부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겉에서 보이는 밀라 주택의 거죽은 리듬감 있게 율동하는 유기적인 덩어리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 채석장)’라는 별명도 너울거리는 입체 때문일 것이다. 고전주의는 모퉁이 땅에서 적지않은 양식적 어려움을 겪는다. 고전주의는 비례 즉, 조화와 균형을 핵심으로 다루는데 양편으로 135도의 둔각 두 개를 갖고 있는 모퉁이는 상당히 둔해 보인다. 한눈에 훤히 보이는 85m 길이의 입면은 길고 지루할 뿐 아니라, 심지어 좌우 날개의 길이도 서로 다르다. 가우디는 자칫 지루하고 둔해 보일 수 있는 이 덩어리에 너울거리는 새로운 리듬을 통하여 긴 호흡을 짧게짧게 끊어낸다.

가우디의 건축은 이성과 감성의 새로운 균형이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탄생했다. 40대의 가우디가 그리스, 고딕, 바로크 까지 다양한 양식을 가리지 않고 실험 했다면, 60대에 이른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건축 문법을 선보인다. 밀라 주택 이후 그는 자연을 닮은 유기적 형태를 구현하기 위한 보다 합리적인 방식에 관한 기술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성가정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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