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_[도판1. ‘팔라우구엘‘은구도심에있는구엘가문의연회용저택이다. 사진: Thomas Ledl (Wikimedia Commons)]
가장 역동적인 도시 바르셀로나
가우디가 활동한 20세기 초 바르셀로나는 가장 역동적인 도시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부호가 되어 돌아온 인디아노들1)이 사회 지도층에 편입되었고, 산업 자본가들은 누구에게 질세라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뽐내고 싶어했다. 단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예술도 이런 세태를 반영했다. 인상파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본질을 탐구하기보다 잠시 잠깐 존재하다가 사그라질 ‘찰나의 빛’을 포착하려 애썼고, 미래파는 다가올 영광된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속도, 운동, 충돌’ 같은 역동 개념에 심취하여 구 세대의 폭력적 파괴에까지 이르는 다이내미즘을 주창했다. 1906년부터 1912년까지 건설된 밀라 주택의 역동성은 클로드 모네의 ‘수련(1906)’ 연작이나 자코모 발라의 ‘달리는 개의 다이내믹(1912)’과 같은 동시대 감각이었다. 밀라 주택을 빚어낸 60대 가우디의 역동성을 30대 가우디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어제의 양치기 오늘의 귀족
우리는 가우디의 후원자인 에우세비 구엘을 부유한 가문의 백작으로 기억하지만 그가 처음 작위를 받은 1908년, 그는 이미 61세였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부유한 명문가는 아니었다. 아버지 조안 구엘은 인구 2000명 남짓 되는 카탈루냐의 작은 마을 토레뎀바라 출신으로 넉넉치 않은 형편 탓에 아메리카행을 선택하게 되었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상선 운행을 배운 조안 구엘은 18살이 되던 해, 다시금 대서양 건너 쿠바에 정착했고 하바나에서 수출입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미국과 유럽의 선진 기술을 두루 익히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1838년 직조 기계 제작과 직물 제작에 뛰어들어 스페인 내 벨벳 생산을 독점하며 국내 면직물 산업에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런 사업적 성공을 발판으로 정치에도 입문하여 스페인 하원의원과 바르셀로나 시의원, 이사벨 2세의 지명으로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도판2. 철문한가운데용, 오른쪽기둥위에금빛사과가놓였다. 사진: 이병기]
에우세비는 조안 구엘이 46세에 얻은 귀한 아들이다. 에우세비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와 이복 여동생도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당대의 유력자 안토니오 로페스2)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구엘가는 단 한 세대 만에 스페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성공 신화는 가우디 건물의 장식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구엘 별장 출입구에는 금빛 사과와 커다란 용 장식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는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서쪽 정원에서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는 황금 사과를 따온 영웅담을 기념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스페인 서쪽의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땅 아메리카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큰 성공의 열매를 따온 선대들의 용기를 칭송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과업을 노래하는 ‘아틀란티다’는 에우세비의 장인 안토니오 로페스를 기리는 헌정시의 제목이었고,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구엘 저택의 람블라스 쪽 외벽에 크게 그려진 구엘가 탄생의 설화 소재이기도 했다. 가우디가 그린 구엘가 문장에는 ‘어제의 양치기, 오늘의 귀족’이라고 쓰여 있다. 양치기였던 과거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그들의 지위가 선대로 부터 거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이 시대의 가치를 드러내는 진정한 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류 계급으로서의 기품과 우아함, 풍요로움을 드러내되 고인 물처럼 마냥 정체되어 그리스와 로마를 회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변화야말로 그들을 귀족 되게 한 원동력이었고 그들이 사는 집에는 이러한 정체성이 오롯이 새겨졌다.
세개씩 묶여진 전실의 독특한 기둥열
구엘 저택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지어진 건물이다. 일반적인 주택으로 보기에는 규모에 비해 일상 생활공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이는 이 집이 아버지 조안 구엘이 물려준 람블라스 길 주택과 뒤쪽으로 연결된 별관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에는 구엘 부부와 큰 딸, 딱 세 사람의 방 외에 가족들의 공간이 따로 없다. 정면에는 마차가 들어가고 나오는 두 개의 거대한 철문만 있을 뿐 걸어서 들어가고 나오는 출입구가 아예 없다는 점 역시 연회용이라서 갖는 특징이며, 하부에는 집으로 들어온 마차가 후진을 하지 않고 일방통행으로 한 바퀴를 휙 돌아나갈 수 있는 순환 동선을 갖추고 있다. 지하에는 마굿간이 있고, 일층에는 경비실과 허드렛집안 일에 사용되는 가사 공간이 숨겨져 있다. 집 전체를 둘러봐도 방문객들을 위한 손님 맞이 공간만 있을 뿐, 부엌이나 창고 등 가사 공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는 가사 서비스 공간이 길 쪽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뒤편으로 완전히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도판3. 전실의기둥들은세개씩묶여삼각편대를이루고있다. 사진: Jun Seita (Wikimedia Commons)]
중간층에서 연회용 계단을 타고 한 층을 더 올라가면 금박 장식된 목재 천장과 매끈하게 물갈기된 파라볼릭 아치로 구성된 지극히 화려한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중심 공간인 살롱 바로 앞 전실에 있는 12개의 기둥들은 3 개씩 4 개의 군을 이루고 있는데 앞쪽 기둥은 굵고 뒤쪽 기둥은 얇은, 조금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 기둥은 삼각형 기둥 받침에서 같이 시작했지만 서로 갈라지면서 앞뒤로 느슨한 두 개의 면을 형성한다. K-pop 그룹이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멤버 12명이 평행한 면을 이루며 한 줄로 주르륵 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매순간 노래를 부르는 멤버들은 한 발 앞으로 나오고, 뒤쪽에 있는 멤버들은 곧 앞으로 나올 준비를 하며 무대에 긴장감을 자아낸다. 앞뒤로 늘어선 구도는 그 자체로 역동적이지만 누구나 역동감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례와 안정감을 중요시하는 고전 건축은 기둥을 옆으로 펼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비례는 사물의 상대적인 위치와 크기를 따지는 것이기에 앞뒤로 배치되면 그 순간 비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같은 크기라도 가까운 것이 더 크게 보이고, 또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두 열의 상대적인 위치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택의 중심인 살롱에서 보이는 이 기둥들의 배열은 디자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바깥이 보이는 유일한 방향이기 때문에 건축가라면 누구든지 이곳을 최대한 넓게 열어놓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이 기둥들이 장식이 아니라 실제 건물 하중을 버텨야 하는 구조체라는 데 있다. 사이 간격을 벌리면 기둥은 더 두터워져야 한다. 옆 방과 같은 직경의 기둥들을 배치하고 같은 간격을 유지하던가 더 두터운 기둥을 사용하고 간격을 더 넓히던가 하는 것은 디자인적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후자를 선택한다면 옆 방과 다른 굵기의 기둥이 사용되면서 전체적인 통일감이 떨어지고 다소 어수선하게 보일 수 있다. 가우디의 판단은 옆 방과 같은 직경의 기둥을 두 배 간격으로 배치하고 구조적으로 모자란 부분은 한 발 물러선 뒤편에 얇은 기둥 둘을 더하는 것이었다. 네 개의 기둥이 앞으로 나서면서 하나의 면을 형성하자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뒤쪽 기둥들은 초점이 흐려진 배경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등장한 뒷열의 존재에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가우디는 삼각형 기둥 받침을 통해 세 기둥을 다시 하나로 엮어 이들이 본래 하나에서 분할된 2열임을 보여주면서 문법적 조율을 시도한다. 가우디의 해법이 나름 절묘하지 않은가? 이 독특한 기둥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상상치 못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얼핏 봐도 4층은 될 것 같은 엄청난 높이. 바로 구엘 저택의 중심축인 살롱이다.

[도판4. 건물안에서갑자기만나는 16.4m 높이의공간은압도적이다. 사진: (Tomàs) (Wikimedia Commons)]
한 가운데 있는 흐르는 공간
구엘 저택은 건물이 물샐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구도심에 지어졌다. 옆집과 양쪽 벽을 공유하고 있어 창은 앞뒤로만 낼 수 있는 구조다. 크고 뚱뚱한 집은 채광과 환기에 불리하여 보통 세장형이라고 불리는 얇고 길쭉한 건물이 들어서는 땅이다. 이런 곳에서는 가운데가 가장 쓰기 애매한 부분이다. 구엘 저택의 살롱은 한가운데 위치한 중심 공간이지만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공간’이다. 그리 넓지 않은 이 방은 전실로부터 들어오는 출입구를 시작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뒷집으로 연결되는 통로, 식당으로 향하는 쪽문까지 총 네 개의 동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실제로 앉아 사교 활동을 할 만한 고인 공간은 창이 있는 건물의 앞뒤쪽으로 산개해 있고, 가운데 있는 거대한 살롱이 그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요리조리 펼쳐진 여러 방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형상이다.
살롱이 흐르는 공간이라는 것은 평면 상세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동선들은 전략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그곳은 모두 안정감과 명쾌함이라는 고전 건축의 성격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곳들이다. 이동을 위해 뚫은 구멍들이 모두 살롱의 모퉁이 부분을 비워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입체를 어떻게 인식할까? 입체를 그릴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는 것이 바로 모퉁이, 즉 사물의 가장자리다. 모서리를 지우면 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결국 명쾌한 경계를 잃은 안과 밖의 공간은 서로를 침범한다. 비 오는 날 대청마루에 앉아서 행랑 건너 산자락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다. 신을 신고 벗는 것을 기준으로 하자면 마루 끝이 경계일 테고, 비에 젖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하자면 처마 끝일 테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자면 건너 산자락까지가 다 한 공간 아닌가. 기둥과 보 위에 지붕을 더 넓게 드리우는 동양 건축에서 익숙한 이 공간감은, 돌로 벽을 쌓아 공간을 한정하는 것이 주류인 서양 건축에서는 20세기 초 철근콘크리트와 철골이라는 건설 방식과 만나면서 비로소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도판5. 식당으로가는통로로인해살롱의왼쪽모서리가완전히비워졌다. 사진: 이병기]

[도판6. 바르셀로나파빌리온에서바닥과벽, 천장은닫힌상자를만들지않는다. 사진: Wojtek Gurak (flickr)]
열린 평면 그리고 해체된 상자
이러한 한옥의 공간감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로비하우스의 열린 평면과 비교해볼 만하다. 지붕이 평평하고 길게 연장된 이 집에서 공간은 ‘닫힌 상자’를 이루지 않고 수평 천장을 따라 바깥을 향해 쭉 미끄러진다. 건축가 헤리트 리트펠트는 자신이 설계한 슈뢰더 주택에서 이러한 ‘해체된 상자’의 실재를 유감없이 보여줬고, 미스 판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도 비슷한 개념을 담고 있다. 세 명의 건축가가 철근콘크리트와 철골이라는 새로운 건설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면, 가우디는 육중한 돌 건축으로는 여간해선 만들 수 없는 열린 공간의 개념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철근콘크리트가 나오기 전 이러한 건축가의 시도들이 새로운 건설 기술을 만나 새로운 공간의 꽃을 피운 것이 아닌가 상상해본다.
당대 구엘 가문의 위상은 정말 대단했다. 그 덕에 이 저택은 가우디가 설계한 어떤 건물보다 화려하고 값비싼 재료들로 지어졌고, 장식을 담당한 목수, 석공, 화가, 조각가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능력치를 보여준다. 30대 젊은 가우디를 대표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어떤 연구자도 구엘 저택을 가장 먼저 꼽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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