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예술 2월호] 안토니 가우디_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표지] _ 그림 1. 구엘 공원. 원래는 전원형 주택단지로 계획되었으나 이후 시에서 구입하여 공원으로 바뀌었다. (사진: Jorge Franganillo, ‘flickr.com‘)

역동적인 형태와 복잡한 기하학, 기괴한 문양과 화려한 색채. 한없는 자유 속에서 보는 이의 감각과 감성을 한껏 고양시키는 이 건축을 우리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누구도 이해못할 괴짜 건축가의 작품으로 치부해야 할까? 가우디는 ‘예술은 모든 사람을 설득해야하므로 그 시작부터 보편성을 띈다’고 말하며 예술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그는 1900년 바르셀로나 건축상의 초대 수상자였고 한세기가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보편성에 근거하지 않은, 단지 독특한 개성의 발로라면 어떻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가우디가 학교를 다니며 배운 신고전주의 뿐 아니라, 전통과 고전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아르누보의 물결 역시 ‘지금, 여기’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반응이다. 20세기 초 바르셀로나가 지닌 독특한 환경은 이에 걸맞는 예술의 탄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계몽주의 이후 뿌리깊게 자리잡은 과학적 세계관, 그리고 혁신과 번영이 불러온 변화와 역동에 대한 동경. 그 가운데 형성된 가우디 건축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에 관심을 두었고 그 시대 감각이 오늘날 현대인의 입맛에도 어딘가 맞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세기말 바르셀로나_변화와 활기로 가득찬 도시
그림 2. 시우타데야 공원. 이곳에서 스페인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사진: Isiwal, ‘Wikimedia Commons’)

안토니 가우디는 20세기초 스페인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활동한 스페인의 모더니즘 건축가다. 카탈루냐의 수도인 지중해 항구도시 바르셀로나는 당시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 번영을 바탕으로 다시금 자신만의 문화 정체성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고, 이는 곧 ‘카탈루냐 현대운동’을 뜻하는 ‘모데르니스마 카탈라Modernisme català’라는 흐름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카탈루냐어를 사용한 문학축제를 다시 개최하거나, 지역 산야를 함께 돌아다니며 카탈루냐 지방 특유의 자연과 역사 유적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기념하는 유람협회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카탈루냐 모더니즘은 당대 유럽 주요 도시들에 등장한 아르누보라는 새로운 문화 흐름과의 교류 속에서 전통과 역사를 벗어난 영감의 원천을 활기와 역동감이 넘치는 자연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산업을 선도하는 도시였고 유럽엔 큰 전쟁이 없었다. 사람들은 발전과 번영,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사랑하게 된다. ‘이 변화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까?’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바로 내일의 변화를 아름다운 것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다. 위에 소개된 만국박람회장의 시우타데야 공원 분수는 가우디가 학생시절 주셉 폰세레 선생님을 도와 참여한 작업이다. 휘황찬란 반짝이는 이 구조물을 보면 당대 카탈루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활기와 역동감, 우리가 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자연이야 말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이 아닌가. 이 시기 바르셀로나에서는 아직 추상화 되지않은, 여전히 살아숨쉬는 것 같이 생생하게 채색된 자연물 장식이 유행했다. 우리는 가우디를 화려한 자연물을 사용하는 가장 장식적인 건축가로 여기지만 안토니 가우디, 유이스 두메넥, 주셉 푸치라는 당대 이름을 날리던 세 명의 라이벌 건축가 중 뜻밖에도 가우디는 장식을 가장 절제한 건축가였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산업 생산과 건설 기술에 있었다. 20세기 초 카탈루냐의 이러한 사회 문화적 환경은 조형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안토니 가우디 바로 다음 세대에는 파블로 피카소, 조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파우 가르가요 등 걸출한 카탈루냐 조형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기존 형식의 파괴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드러내는 예술가들이었다. 

그림 3. 건축가 유이스 두메넥이 설계한 카탈루냐 음악당. 다채색 자연물 장식은 당시 카탈루냐 모더니즘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사진: Maxime HUSSON, ‘flicker.com’) 
조화, 균형 그리고 보편성

“기하학적으로 건조한 형태가 지나치게 반복된다면 적절한 대비를 위해 일반 형태와 관련되지 않은 아주 자유로운 형태를 가진 오브제가 필요하다. 익티누스가 선보인 피갈리아 〈아폴로 신전〉의 주두는 뾰족해진 모서리를 드러낸 아바쿠스, 새로운 정사각형들, 그 아랫쪽의 원형 몰딩, 아바쿠스에 새겨진 요철 문양, 목두름띠, 짙어진 주신의 홈, 반복된 몰딩으로 강조된 주초 부분의 형태로 인해 보다 자연에 근접한 팔메트를 요구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것들을 지배하고 앞서 등장한 몰딩들의 조합을 중화시킬 무언가를 빚어낼 하나의 양식을 요구해왔다. 단순하고 역학적인 형태를 가진 도리아식 주두는 (주신을 따라 파인) 홈의 끝단을 두름띠로 잘 동여맨 다음에는 지극히 평범한 자연의 형태 외에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 이와 달리 〈리시크라테스 기념비〉는 지나치게 과장된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다각형을 층층이 쌓아 올린 정사각형 기단 위로 무거운 원통이 놓여 있는데, 이는 기둥으로 만든 고깔을 거대하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처럼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주도한 곳에는 모름지기 더욱 정밀한 자연 외에 무엇도 올 수 없는 법이다. 피갈리아 〈아폴로 신전〉에는 아칸서스와 꽃, 아름다운 줄기가 빠질 수 없었고, 그곳의 천장은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그 주두를 위해 잎사귀와 개구부를 가진 하나의 막이 되어야 했다.” (가우디의 건축노트 “장식” 글 중에서)

그림 4. 피갈리아 바사에 신전 중앙의 기둥은 코린티안 오더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례다. (도판: ’wikipedia.com´) 
그림 5. 더 발전된 코린티안 주두. 에스테르곰 바실리카. (사진: Christopher Walker, ´flicker.com´)  
그림 6. 리시크라테스의 기념비. 에스테르곰 바실리카. (사진: Christopher Walker, ´flicker.com´)

26살 가우디는 수첩에 ‘조화’와 ‘균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했다. 그의 노트에 등장하는 건물은 피갈리아 지역의 아폴로 신전과 리시크라테스 기념비다. 이 신전은 코린티안 주두가 처음 발견된 장소였다. 코린티안 주두는 기하학적인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도릭 주두를 변형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주두 형식을 주름잡는 기하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식물 모양을 사용하면서 큰 장식적 대비를 이루고 있다. 가우디는 기하학적으로 건조한 형태가 “지나치게” 반복된다면 대비를 이루기 위한 자유로운 오브제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그는 기하학에 기하학을 쌓아 올린, 다시 말해 ‘기하학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건조한 형태’를 이룬 리시크라테스 기념비를 조화롭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밀한 자연’을 통한 대비가 절실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우디가 주목했던 점은 고전 건축가들도 이런 대비와 조화에 둔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우디는 고전 미(아름다움)의 근본 원리 중 하나로 조화la harmonia를 꼽았는데, 조화는 균형el equilibrio을 이룬 상태이기에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것은 이미 균형을 잃은 것이요. 균형을 잃은 것은 결국 조화롭지 못한 즉,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 주장했다.

가우디가 살았던 시대는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후, 분명 과학적 세계관이 주도하던 이성의 시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변화가 주는 활기와 휘몰아치는 충동으로 가득한 감성의 시기이기도 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머리와 심장으로 대변되는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 이 둘은 우리 안에 늘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이 시기만큼 서로를 주장하던 시기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같은 충돌을 목도하고 있다. 가우디 건축의 보편성은 두 시대의 공통 감각을 다루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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