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리카르도 오피소가 그린 에우세비 구엘과 안토니 가우디. 어깨를 마주한 두 사람의 모습이 친근해 보인다.)
전문지 <대전예술> 2025년 3월호에 내가 보낸 원고를 일부 인용한 것이다. 원고 분량상 이번에 파악한 구엘가의 시시콜콜한 내용을 담을 수는 없어 아쉬운 마음에 간단히 몇자를 더 보태쓴다.
에우세비 구엘과 관련된 인물들
한국식 발음 | 스페인 이름 | 가족관계 | 생몰연도 |
에우세비 구엘 이 바시가루피 | Eusebi Güell i Bacigalupi | 본인 | 1846 – 1918 (72세) |
조안 구엘 이 페레르 | Joan Güell y Ferrer | 아버지 | 1800 – 1872 (72세) |
안토니오 로페스 이 로페스 | Antonio López y López | 장인 | 1817 – 1883 (65세) |
이사벨 로페스 이 브루 | Isabel López i Bru | 아내 | 1850 – 1924 (74세) |
이사벨 구엘 이 로페스 | Isabel Güell i López | 큰 딸 | 1872 – 1956 (84세) |
조세피나 구엘 이 바시가루피 | Josefina Güell i Bacigalupi | 여동생 | 1853 – 1874 (21세) |
● 어제의 양치기 오늘의 귀족
우리는 가우디의 후원자인 에우세비 구엘을 부유한 가문의 백작으로 기억하지만 그가 처음 작위를 받은 1908년, 그는 이미 61세였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 그는 귀족이 아니었고, 그의 집안도 유서깊은 명문가는 아니었다.



아버지 조안 구엘은 인구 2000명 남짓 되는 카탈루냐의 작은 마을 토레뎀바라 출신으로 넉넉치 않은 형편 탓에 아메리카행을 선택하게 되었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상선 운행을 배운 조안은 18살이 되던 해, 다시금 대서양 건너 쿠바에 정착했고 하바나에서 수출입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미국과 유럽의 선진 기술을 두루 익히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1838년 직조 기계 제작과 직물 제작에 뛰어들어 스페인 내 벨벳 생산을 독점하며 국내 면직물 산업에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1846년 ‘바포르 벨Vapor Vell’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Güell, Ramis y Compañía’ 회사를 공동 설립한다. 이런 사업적 성공을 발판으로 정치에도 입문하여 스페인 하원의원과 바르셀로나 시의원, 이사벨 2세의 지명으로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에우세비는 조안 구엘이 46세에 얻은 귀한 아들이다. 에우세비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와 이복 여동생도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당대의 유력자 안토니오 로페스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구엘가는 단 한 세대 만에 스페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떠올랐다. 안토니오 로페스는 조안 구엘과 같이 인디아노였는데, 해운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1878년 ‘코미야스 후작’, 1881년 ‘그란데사 데 에스파냐’에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란데사 데 에스파냐는 스페인 귀족 서열이 가장 높은 품위이다) 이 같은 성공 신화는 가우디 건물의 장식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구엘 별장 출입구에는 금빛 사과와 커다란 용 장식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는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서쪽 정원에서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는 황금 사과를 따온 영웅담을 기념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스페인 서쪽의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땅 아메리카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큰 성공의 열매를 따온 선대들의 용기를 칭송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과업을 노래하는 ‘아틀란티다’는 에우세비의 장인 안토니오 로페스를 기리는 헌정시의 제목이었고,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구엘 저택의 람블라스 쪽 외벽에 크게 그려진 구엘가 탄생의 설화 소재이기도 했다.

가우디가 그린 구엘가 문장에는 ‘어제의 양치기, 오늘의 귀족’이라고 쓰여 있다. 양치기였던 과거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그들의 지위가 선대로 부터 거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이 시대의 가치를 드러내는 진정한 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류 계급으로서의 기품과 우아함, 풍요로움을 드러내되 고인 물처럼 마냥 정체되어 그리스와 로마를 회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변화야말로 그들을 귀족 되게 한 원동력이었고 그들이 사는 집에는 이러한 정체성이 오롯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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