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돌 건축에 부드러움을 담다_베예스구아르드의 겉과 속

‘토레 베예스구아르드’ 주택이 지어진 곳은 마르틴 1세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Canaan, ‘Wikimedia Commons‘)

토레 베예스구아르드는 가우디가 1900년에서 1909년 사이에 설계한 건축물로, 일부 작업은 다른 건축가들에 의해 1916년경 마무리됐다.1 바르셀로나 북쪽 코르세롤라 산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중세 시대 마르티 1세에 의해 건설된 옛 성이 있던 곳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주택은 이 성의 유적을 포함한 영역에 개입하고 있다. 40대 가우디는 고딕 건축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 시기 고딕풍이 짙은 카스티야 북쪽 지역에서 건축 활동을 이어갔던 것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2


이 건물의 특징은 건물 안밖의 극적인 대비이다. 짙은 색으로 각이 툭툭 불거져 단단한 중세 요새를 연상시키는 외양과 달리 내부는 흰색으로 칠해진, 모두 둥글게 모가 깎여진 내부는 추상화 되어있고 총천연색 스테인드글라스가 영롱하게 까지 보인다.

말랑거리는 마쉬멜로우처럼 부드럽게 처리된 내부는 거칠한 외부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Canaan, ‘Wikimedia Commons‘)

이 지역에서는 로마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도 방어 요새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세 시대에 이 지역은 ‘발블랑Vallblanc‘으로 불리며, 알폰소 2세 왕 때부터 사냥 보호구역으로 사용되었다. 1408년 마르티 1세 왕은 바르셀로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채를 짓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 이름붙였고,3 1409년 이곳에서 마르가리다 데 프라데스Margarida de Prades와 결혼식을 올렸다. 1410년 왕이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살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17세기에 성채는 카탈루냐의 유명한 산적 세라롱가의 은신처로 사용되기 했지만 스페인 독립 전쟁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ñola, 1808 – 1814 중 일부가 파괴되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다시 파괴되어 폐허로 남겨졌다. 가우디는 성채의 옛 벽과 방어용 탑들을 보존하면서 이 주택을 설계했다.

폐허로 남겨진 베예스구아르드 성채(1896), 사진: Fernando Rus Busquets, ´Wikipedia´

베예스구아르드는 중세 성채의 느낌을 보존하면서 신고딕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물이다. 건물은 15 × 15m 크기의 정사각형 평면에 높이는 19.5m이다. 입구 홀은 높이가 10m에 이르며 아치형 천장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있다. 세부 장식은 두메넥 수그라녜스Domènec Sugrañes가 맡았다. 다락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층과 아래층의 구조가 직교하여 경쾌하다.

한 귀퉁이에 위치한 주 출입구의 주변은 도드라진 타일로 강조되어 있다. (Canaan, ‘Wikimedia Commons‘)

주 출입구 아치 위에는 “흠없고 순결한 성모 마리아, 죄 없이 잉태되셨나이다Ave Maria Puríssima, sens pecat fou concebuda“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부분의 타일은 인근에서 구한 작은 돌 조각들을 색깔 별로 따로 모아 제작한 것으로, 주변의 색과 조화를 꾀했다. 현장의 석재를 활용하여 그곳의 경관과 이질감없이 짝맞추는 방식은 구엘 공원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다.

자체 제작한 타일은 잣히 보면 작은 돌조각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Canaan, ‘Wikimedia Commons‘)

  1. ‘토레’ torre는 탑을 뜻하는 스페인어. 때에 따라선 정원이나 넓은 부지를 가진 중세풍의 단독주택이나 별장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명칭은 건축 양식이나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베예스구아르드’는 카탈루냐어로 경치가 좋다는 뜻이다. ↩︎
  2. 테레시아나 수도원 학교Col·legi de les Teresianes, 1888~1889, 아스토르가 주교관Palau Episcopal d’Astorga, 1889~1915, 보티네스 주택Casa Botines, 1891~1894, 구엘 와이너리Celler Güell, 1895~1897, 토레 베예스구아르드Torre Bellesguard, 1900~1909 등 작업에서는 고딕풍이 느껴진다. ↩︎
  3. 아라곤 왕국 제16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제22대 국왕. 바르셀로나 왕조 최후의 국왕인 마르티 1세1356 ~ 1410는 인문학과 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인문학적 마르티Martí l’Humà“라는 호칭으로 불리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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